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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의 최근 모습. 무섭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매우 유력한 용의자가 특정되어 떠들썩한 시기가 있었다. 이춘재, 그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 외에도 수 건도 더 넘는 살인사건을 자백한 상태이며, 현재 총 15건의 살인과 30여 건의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가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저질렀다고 자백한 대부분의 범죄들은 공소시효가 지나버려서 처벌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에게 훨씬, 보다 가혹한 수준의 처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만약 이춘재와 비슷한 수준의 범죄자들이 어마어마하게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의 어느 악명 높은 방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방은 예산의 문제로 여름과 겨울에 냉방과 난방이 되지 않았는데, 어느 해 부터인가 획기적인 수준의 냉, 난방 기술이 개발되어 냉, 난방을 해주고자 한다. 교도소의 관계자들은 이 사안에 모두 동의했고, 예산편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 수준이므로 흔쾌히 수락했다고 하자.

 당신이 길을 걸어가는 일반 시민이라면 이러한 뉴스를 접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드는가? 아마 썩 달갑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하지 못할 짓을 수도 없이 벌였기에. 이러한 이유로, 그들이 받는 인간 수준의 편의와 복리가 짐짓 불편하며, 박탈시켜야 될 무언가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범죄자들도 어떠한 수준의 인권이 있기에,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바람을 피하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제공받고, 식사를 하며 지내고 있다. 이를 사회로부터 그들을 격리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 유명한 존 스튜어트 밀 되시겠다.

 공리주의자들이라면 이러한 질문에 어떻게 답할까? 아마 그 방에 냉, 난방을 해줘야 할 것이라 답할 것이다. 그 방 하나에 난방을 가동함으로 추위에 떠는 수많은 범죄자들의 많은 공리가 증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시민들이 이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어, 사회적으로 많은 불쾌감이 형성된다면 공리주의자들은 역으로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이야기는 어딘가 불편하다. 이는 공리주의가 처절하게 공격당하는 지점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기존의 공리주의와 타협하다 더욱 격렬하게 공격받았다. 공리주의는 모든 개개인의 고통과 쾌락을 동등한 것으로 간주하고 판단한다. 저 사람의 공리와 내 공리는 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며, 그것 간에는 색깔의 차이도, 무게의 차이도 없다. 그저 더해서 크면 좋고, 적으면 나쁘다. 범죄자의 고통과 쾌락이 나의 고통과 쾌락과 동등한 것으로 가늠될 수 있다.

그 유명한 칸트다.

 언뜻 보기에 이러한 공리주의의 논리와 극단에 서 있는 논리를 펴는 사람이 칸트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인간 개개인이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존엄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심지어 본인 스스로조차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필자가 공상 속에서 만들어낸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어느 방에 앞서 언급한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범죄보다 건수로는 백 배는 족히 될 살인과 성범죄를 저지른 존재가 의자에 묶인 채로 갇혀있다. 그는 기적적으로 법과 공권력의 수사망을 모조리 피해 법적 처벌을 받을만한 아무런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당신은 우연히 그 방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가 극악무도한 범죄를 가공하리만치 저지른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꽤나 정의로운 사람이고, 꽤나 호전적인 사람이다. 그 연쇄살인마에 대한 강한 분노감을 느끼며 그가 묶인 의자 앞에 놓여있는 날카로운 칼을 발견한다. 당신이 방을 떠난다면, 그는 곧 속박을 푼 채로 사회로 유유히 달아나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이 경우에 그를 죽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의식에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는 절대 법칙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칸트가 주장하는 정언명령에 가깝다. 여기서의 사람은 그가 키가 크든 작든, 어떤 색깔을 좋아하든,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사람이 아니다. 정언명령에는 예외가 없다. 그렇다면 만약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당신이 그를 칼로 찔러 응징한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모르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하자. 이 경우에 당신은 그를 칼로 찔러 죽일 것인가?

 이러한 가정은 우리에게 살인을 대하는 사고방식과 태도를, 온전히 칸트와 같이 하고자 함이다. 만약 사람을 죽여도 어떠한 법적인 처벌도 받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인을 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처벌을 받게 되기 때문인가? 칸트에 따르면 이는 가언명령에 가까울 것이다. 칸트라면 두 번째 전제조건에서도 그를 칼로 찔러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점에서 칸트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정말로 인간의 존엄성은 모두가 동등한 수준으로 가지고 있는가에 관한 의문이다. 칸트는 인간을 존중받아야 할 존엄성을 지닌 이성적 존재로 간주한다. 그러나 존중이라는 키워드는 너무도 막연하고, 실제로 수많은 인간을 마주하고 사는 현실 속에서 모든 인간에게 그러한 논리를 적용하기에는 막막하다. 이춘재의 존엄성은 얼마나 무거운가.

물론, 칸트는 원칙에 있어서의 담론을 펼치는 것이지만, 이러한 논리를 비약 시킨다면 위의 살인자가 검거되어 언도받는 사형 역시도 사회적 살인이 아닌가? 그는 정말로 천인공노할 일들을 벌였고, 이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규율을 아득히 벗어난 것이기에 그를 영원히 격리한다. 이것 역시도 살인이다. 하지만 칸트는 일종의 응보 원칙을 들어 사형제에는 찬성한다.

그 유명한 마이클 샌델.

 마이클 샌델도 직접 언급했듯이 칸트의 존엄성과, 자율에 관한 이야기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가 절대자의 논리에 기대는 대신.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신성불가침 영역을 만들어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세운 옮음을 위한 옳음의 법칙을 행하는 것이 자율이라고 간주하는데, 만약 이러한 옳음의 법칙에 따라서 철저하게 악인만을 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자율의지에 따라 철저하게 악인만을 살해하는 사람역시 다시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 되는가? 만약 자신의 어떠한 이해관계와도 무관하게, 순수히 악인들을 처단한다면 그는 어떠한 논리요소로써 판단되는가? 칸트는 욕구를 우연히 파생되는 무언가로 생각했고, 이러한 경험적 요소에 따라서 도덕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내세운 판단의 기준은 이성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성조차 개개인에 따라서 경험적으로 다르게 작동될 여지가 있다

 내 공상의 결말은 이러하다. 상황은 동일하다. 나는 내가 살인마를 응징하더라도, 어떠한 공권력의 심판도 받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정의감과 칼 사이에서 벌벌 떨고 있다. 이때, 그 절대적인 존재가 내게 말한다. 그러한 전제조건들에 더해서, 내가 그 살인마를 죽였다는 사실을, 살해한 이후에 내 자신 스스로조차 기억을 못하게 해주겠다고. 나는 다음날 내 침대에서 일어나게 되고, 어쩌면 뉴스에서 어느 신원미상의 남자가 칼에 찔려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출근하게 될 것이다. 과연 이러한 상황이 가능하다면 당신은 그 칼을 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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