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는 영국을 제외하고 유로화(€), 단 하나의 통화가 통용된다. 이것은 ‘단일통화’를 통해 경제원리를 통합하고 나아가 분할된 정치영역까지의 합치를 꾀하는 이른바 유러피언 드림의 구상을 의미했다. 이것이 작동하는 유로존에서 시민들은 종전의 환전으로 인한 수수료와, 가격 비교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즉, 서로 다른 체제와 가치를 지닌 화폐들을 하나의 논리로 통섭함으로써 얻는 경제적 이익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리를 우리가 가진 감정과 쾌락들에도 적용해본다면 어떨까? 어떤 이익들이 존재하는가.
만약 내가 옆 사람 A의 ‘피와 살’을 취해야만 (차마 인육을 먹지 못하는 비위를 차치하고서), 살아날 수 있는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에 있다면, 나는 이것을 취해 살아날 것이다. A는 가족도, 그의 죽음을 슬퍼할 그 누구도 없다. 나는 부양할 가족과 나를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바다 건너편 육지에서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내가 죽었을 때 땅에서 울려 퍼지게 될 슬픔의 절규들과, A의 ‘의미 없는’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저울질해보니, 전자가 크리란 것은 자명해 보인다. 더군다나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닌가? 더불어 살아날 사람은 세 명이나 된다. 공리주의적 측면에서 본다면 선택은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갈 육지의 법과 사회적 규율에 어긋나는 살인행위는 이 경우에 허용되는가? 법과 규칙을 위배했을 때 파손되는 가치들로 인한 장기적인 사회적 불이익은 어떠한가. 이 불이익과 그의 죽음의 슬픔을 더한 것이 우리 셋의 목숨값보다 작다면? 덧셈과 비교가 가능한가? 이 수식은 누가 작성해 누가 하는가?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거지를 구빈원에 몰아넣고 극단적 테러리스트의 딸을 고문하는 모습들은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어딘가 불편하다. 이를 샌델은 2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전체의 공리를 추구하기 위해 희생되는 소수의 권리다. 이것은 당연해 보이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결부지어, 밀의 주장에 대한 샌델의 첫 번째 반박은 참신하고 또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사회발전을 위해서 보장되는 개인의 권리는 불확실한 상황에 놓인 볼모와 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우리의 권리들이 어쩌면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 희생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공리주의의 논리 안에서는 어쩌면 놀라울 것도 아니다. 즉 공리주의는 애초에 우리 개개인의 모든 권리와 개성을 하나의 ‘단일통화’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의 도시를 위해서 희생되는 지하의 한 아이를 생각해보자. 1억 명의 행복을 위해서 한 아이가 고통받아야 한다면 이것은 정당한가? 모두가 눈 감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 그래도 이것은 어딘가 불편하다. 샌델과 궤를 함께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개인의 존엄성을 예로 들며 부당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해질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1장을 읽고 난 후의 내 생각과 같다. 내가 그 아이가 될 수도 있다는 황금률의 내적 적용. 다소 불편해 보이지만, ‘내가 불행을 겪지 않는다.’라는 것과 ‘내가 그 불행의 논리 바깥에 존재한다.’라는 것은 크게 다르다. 만약 행복의 도시에 사는 당신이 어떤 레버를 당김으로써 그 아이가 지하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도시의 모두가 잊어버리게 된다면, 당신은 그 불편함으로부터 해방될 것인가? 레버를 당기면 우리가 높이 쳐드는 인권과 존중심은 어디로 가는가?
둘째, 인간의 감정 즉, 쾌락과 고통을 하나의 저울 위에서 가치 매긴다는 점이다. 마치 흡연이 오히려 사회적 비용을 경감시켜 사회의 공공선에 이바지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흡연회사처럼. 그러나 내가 생각지 못했던 점은, 바로 이러한 ‘측정의 행위’ 자체가 우리에게 불편함을 준다는 사실이었다. 산 지렁이를 씹어 삼키는 일은, 발가락이 잘리고 앞니가 빠지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불편해서 그 대가가 큰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 ‘측정자체'가 불쾌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공리주의를 노려볼 때, 마음속에서 가장 본질적으로 불편하게 느꼈던 이유다. 우리가 가장 무게를 두어 존중하는, 인간 개개인의 권리를 측정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비교하는 것. 우리는 모두가 서로 다르고, 이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각자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다.
밀은 이러한 반박들에 대해서 기존의 공리주의에 인간적 원칙을 첨가, 공리주의와 존엄성 간의 화해를 꾀하고자 한다. 이는 다수의 최대 행복 추구와 개개인의 권리 존중은 배타적이지 않다는 주장과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바람인 존엄성,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밀의 방어는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다수의 최대 행복 추구와 개개인의 권리 존중이 배타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개개인의 행복이 다수행복의 용적을 위해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 있는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 이것은 개인 행복의 총합이 다수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공리주의의 전제가 살아있는 한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반박이다. 또한, 밀의 고급쾌락과 저급쾌락의 분리는 일견 보기에도 논리 반복의 연속이다. 그는 이러한 논리를 계속 전개하기 위해, “자유와 개인의 자립에 대한 애정”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리주의에서 본질적 원자로 간주하는 인간욕망으로의 회귀가 아닌, 인간개성이라는 영역으로의 치환이다. 즉 자신에게 반박하는 영역의 개념들에 기대어 논리를 수호하는 셈이 된 것이다.
또한, 밀의 기본 주장인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은 내게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러한 전제하에 개인의 몸과 마음의 독립성이 절대적일 때, 그가 전체의 공리에 절대적으로 반하는 생각과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시 밀의 논리 안에서 존중받을 한 명의 개인인가? 물론 그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진 않는다. 그가 지닌 존엄성이 남들의 존엄성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면, 역시 그래도 존중받아 마땅한가? 공리주의 논리 안에서, 몸과 마음의 작동양상은 배타적으로 유리화되어 생각될 수 있는 것인가. 샌델의 논리에도 나는 의문이 생긴다. 왜냐면 인간이 더 인간다워지고자 하는 존엄성 역시도 하나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일전에도 서술했듯이, 정의라는 개념은 수학적 논리나 과학적 지식처럼 정식화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다원화된 삶의 현장 속에서 체득하는 것이 바로 정의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를 저울질하는데 주요하게 논의되는 것이 바로 존엄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존엄성의 절대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애초에 정의라는 개념 자체가 삶의 현장에서 체득되는 것이라면, 이러한 기준은 사회와 이미 기존의 사람들이 합의해 세워놓은 관습의 첨탑 안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내가 합의한 적이 없는 계약서로부터 나의 절대적 존엄성이 확립되는 것이라면, 내가 내 존엄성을 포기하고 남들의 존엄성도 무시할 수 있는가? 만약 안 된다면 나는 내 스스로의 욕구 중 한 가지를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최근에, 단일통화를 사용함으로써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각 나라마다 경제력이 상이한데 통화는 하나로 통일함으로써 실제 경제 현실과 통화단위 간의 괴리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많은 나라의 경제정책과 국가경쟁력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욕구들, 쾌락과 고통, 감정들을 모두 동등한 것으로, 혹은 같은 차원의 무엇인가로 간주할 수 있을까? 일견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 생각은 애초에 그러한 비교가 불쾌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내가 10년 만에 만나는 옛 친구를 볼 때의 기쁨과, 같은 상황에서 그 친구가 느끼는 감정은 같지만 다르다. 애초에 그것은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가진 행복의 총합이 이 사회 전체 행복의 총합과 같다고 생각지 않는다. 행복은 더할 수가 없다. 이 행복과 저 행복을 더하면 두 행복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피와 살’이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의 논리다. 유로를 사용한 이후로, 발생한 여러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럽중앙은행은 다양한 경제정책을 펼쳤다. 이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뒀지만, 동시에 아직도 해결 못 한 다양한 숙제들이 남아있다. 우리는 오늘도 수많은 희로애락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우리가 사는 하루 속에 유럽중앙은행 같은 것은 없다. 단지 그것을 느끼는 나 자신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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