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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고, 여러 가지 사회적 활동을 하면서 내가 깊게 느끼게 된 한 가지 생각이 있다. “내 인생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라는 것 내부에 상당히 많은 것들이 포함되고 또 함의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발걸음(물리적으로든, 피상적으로든)을 떼고 움직이는 것, 하고 싶은 바를 시도할 의지와 이것을 지지해줄 가치관들, 소위 내가 주창하는 권리 역시 이에 해당할 수 있다.

 누구나 인생의 진로에 있어서, 혹은 그렇게 거창한 틀에서의 담론이 아니더라도 본인의 의지와 부모의 의견 사이에서 갈등을 빚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만약 나와 내 인생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면, 이러한 갈등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내가 부모의 일부라서? 혹은 나를 길러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에 따른 보답이 응당하기에?

 과연 나의 어디까지가 나의 완전한 소유이며, 내가 어디까지를 전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가는 매우 어렵고 미묘한 차원의 문제다. 가령 내가 길을 가다 마음대로 쓰레기를 버리고 싶은 의지가 있다면, 나는 언제든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가벼운 제재들과 통념적 차원에서 가해지는 도덕적 위신의 손상은 피할 수 없다. 보다 극적으로,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면, 당신은 그를 죽일 수 있다. (물론, 그 수단과 실행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이 경우 당신은 심각한 수준의 법적 처벌과 사회적 자아의 거의 완전한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원하고자 하는바 어느 것 하나 실행할 수 없는, 다시 말해 를 전적으로 소유하지 못한 존재인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질문을 어불성설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세상은 오롯이 나만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고, 거리를 더럽히고,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내가 괘념치 않는다고 완결되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회적 테두리가 우리 주변에서 밝게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란 무엇인가>에 소개된 것처럼 만약 내가 나의 콩팥을 자발적으로 자유시장에 판매하려 한다면? 이 경우 콩팥은 정말로 절실히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적정한 수준의 가격을 받고, 그의 목숨을 살릴 것이다. 언뜻 보기에 문제는 없어 보인다. 나는 내가 온전히 소유한 나의 신체 일부를 그 값을 받고, 나의 의지로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身體髮膚 受之父母 라 반박한다면 딱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자유 지상주의자라면 이 문제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안에 자유라는 아주 소중한 기본권을 이미 지닌 존재이기에,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한다면 나의 소유물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이 그들의 핵심적 골자이다.

 이에 따라서 그들은 크게 온정주의, 도덕법, 소득과 부의 재분배에 있어서 국가정책에 반대한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퇴직프로그램과 최저임금제, 고용차별금지법에도 반대한다. 아무리 낮은 임금과 부당한 조건을 고용주가 제시하더라도, 일할 의지가 있는 자가 자발적으로 응한다면 국가가 여기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야경국가의 개념을 들면 이해가 편하다.

 소득과 부의 재분배에 있어서 논의를 집중해보면, 이들은 금전의 획득방식과 교환절차의 정당성이 입증된다면 개인의 재산권을 존중한다는 입장이다. , 과세는 개인들의 자유의지에 맡길 차원이지, 정부가 강제할 계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빌 게이츠 사례를 보자. 빌 게이츠가 가진 100만 달러가 그에게 주는 행복과 100명의 사람에게 이것을 만 달러씩 나누어 주었을 때 그들이 느끼는 행복의 크기 중, 후자가 압도적으로 크기에 과세는 정당하다라는 주장은 어딘가 불편하다. 공리주의를 논하지 않더라도, 과연 이 비교가 실제로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누가 이를 비교할 권리를 가지며 또 수행하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설령 사회 구성원들이 백 명의 행복의 크기가 압도적으로 크다는 데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그 백 명의 100만 달러를 다시 천 명에게 나누어주는 경우는 어찌 가늠할 것인가.

 자유주의자들은 물론 이러한 논리 구조로 정부 정책에 반대하지 않는다. 노직은 정의로운 분배를 정형화하는 데에 반대한다. 시장에서의 사람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기에, 과세는 일종의 강탈이다. 극단적인 비유를 하자면, 시간을 들여 노동한 댓가가 수익이라면, 수준 이상의 과세는 곧 시간의 강탈이며, 이것은 강제노역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과 그 의지를 국가가 재단해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어떠한 부의 축적이 이전의 초기 소유물로 인해 가능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부당한 방식으로 취득된 것이라면? 이라는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노직 역시 이러한 초기 소유물의 부당함을 판별하는 것의 어려움을 인정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의견에 반박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반대진영에 선다. 1. 동일한 수준의 부는 가난한 이들에게 절실하다. 2. 마이클 조던의 사례처럼, 어떤 이의 과실(果實)은 온전히 한 사람만이 존재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세금을 매기는 메커니즘에 사람들은 이미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4. 그는 행운아다.

 마이클 조던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공을 매끈한 포물선을 그리며 던질 수 있는 능력을 이 사회가 포상하기 때문이라는 반박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때문에, 이러한 반박의 흐름에서 자유주의자들의 자기소유라는 개념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것들을, 우리의 것이라고 확실히 보장받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많은 세금을 국가에 납부하며 살고 있고, 자유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준의 제약과 규제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자기소유와 자기처분을 동일하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글의 서두에 썼듯이, 내 콩팥이 온전히 내 소유라서 판매할 수 있는 자유가 내게 있다면, 목숨을 시장에 내다 팔 권리 역시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도덕적으로 그러한 행위의 시비를 논하기 이전에, 그 차이를 명확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이라면, 자살 방조법은 악법일지 모른다. 만약 자살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것은 온전한 그의 선택이기 때문에 이것을 조금원활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처벌받아야 할까?

 그러나 이전에 국가는 그러한 사실이 실제였는지 판별해낼 능력이 없다는 점을 그들은 간과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국가가 치안과 안전에 대한 수호를 마땅히 해야 하는 야경국가 역할을 수행하려면 이것은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것이 자발적이었는지, 정말로 온전히 자유 하에서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었는지를 온전히 판별키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서 전사회적 혼란이 초래되리란 것은 꽤 자명하다. 교재의 말미에 소개된 사례가 그러하다. 만약 모든 대화와 증거가 조작된 것이고, 실제로는 식인살인마의 강제적 납치와 살인이었다면 국가는 한 명의 개인의 가장 거대한 자유를 냉장고에서 썩힌 셈이 된다. 자기소유와, 이를 행사함으로 벌어질 결과에 따른 책임은 사회에서 별개로 따져야 할 문제다.

 자유란 무엇인가. 실제로 우리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순간이 단 한 순간이라도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참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그러한 사회에 살고 있다. 자유는 어느 순간에도 침해받지 않아야 진정한 자유가 아닌가? 시스템화된 이 사회 속에서 온전한 자유를 논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자유와 자기소유라는 개념의 도덕적 효력을 따지기 이전에 묻고 싶다. 내 자유가 중요하다면, 내 옆에 앉은 사람의 자유도 중요하다. 내가 소유한 자유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면, 자유는 공존하기 위해 양보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인가? 나만의 인생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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