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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현재 일본이 과거 위안부 문제를 사과해야 할까?

역사적 부당 행위는 우리에게 있어 특히나 민감한 문제다. 이는 노골적으로는 일본이라는 국가와 우리 대한민국의 민족적 마찰과 관련이 있다. 특히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많은 정치적 분쟁을 발생시키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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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위안부든, 노예제든. 사죄의 범위와 책임을 따지는 데 있어, 자유주의자들의 약점은 그들의 근거 그 자체로 회귀된다. 내가 자율적으로 내 목적과 이상을 선택하고 이에 따른 의무와 책임만을 진다고 가정해보자. (칸트의 자율성) 이로 인해 자기 자신이 완벽히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 거듭난다면, 우리가 대승적으로 인식하는 정치적·도덕적 의무의 발생 근거를 납득할 수 없게 된다. 애국심과 충성심 같은 것들. 이러한 의무는 어디에서 왔는가? 바로 우리의 공동체 정체성으로부터 온다. 마이클 샌델은 민족적 정체성에서 파생되는 책임과 의무를 부담을 감수하는 자아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이것이 부정당한 집단의 가치와 압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된다면? 카스트제처럼 말이다.

 여기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위해 샌델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주장을 끌어들인다. 우리는 내 가족과 내 민족 내 나라의 과거로부터 빚과 의무도 물려받지만 동시에 유산과 기대 역시 계승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사적 관점은 자신의 과거 선조가 했던 행위를 자신의 자아와 완전히 유리화시켜 간주하는 자유주의적 시각에 큰 시사점을 던진다. 또한, 이는 막연히 우리가 느끼는 분노와 사죄의 인과관계(위안부 문제로 이해하면 편하다)에 도덕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논리적으로 근거해준다. 이를 사죄와 보상을 요구함에 어떻게 담아낼지는 우리의 숙제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들은 자유주의적 입장과 견주어 그 입장과 근거가 상이하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서사적 존재로 간주한다면 우리에게는 연대의 의무, 즉 특수한 공유적 책임이 존재함으로 논리적 확장이 가능해진다. 즉 쉽게 표현하자면 내 삶의 이야기가 온전히 나만의 이야기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들 역시 포함되어 구성된다는 것이다. 샌델은 이것을 특수하며, 합의가 필요하지 않은 의무로 귀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의무가 작동하는 대표적인 집단을 근거 댈 수 있다. 바로 가족이다. 우리는 남보다 우리 가족을 위하는 이유를 보통 응당 그래야 하는 당위적 차원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이 감정을 집단적 책임과 공동체의 의무로 환원시킬 수 있다면, 더 넓은 범위로의 도덕적 의무의 확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는 상호 호혜성과 합의에 근거하는 자유주의 윤리를 극복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폭격기 사례와 에티오피아 사례 역시 공동체로서의 도덕이 확장될 수 있음을 함의한다. 단순히 가족이니까, 국민이니까라는 대승적 차원에서의 이해가 아닌 논리로써의 도덕은 애국심까지도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애국심이 도덕의 차원으로 환원될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이는 우리가 속한 집단의 공통적 정체성에 대해 수긍함과 동시에 연대의 의무를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한다.

 나는 우리 사회 속에서 내가 가지는 의무와 권리가 이미 기존에 형성된 사회구조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개인적 차원에서만 이해되었던 근거들이 집단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이번 장에서 확인함으로써, 보다 다채롭게 민족적 차원의 분쟁과 논의에 대해서 접근할 수 있게 된 기회와 배움이었다. 결론. 아무튼 일본은 사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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