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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이 방한해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공개강연회를 열었다. 14천여 석의 좌석이 인산인해를 이뤘던 것은, 당시 우리나라의 시대정신과 화두가 강연 내용에 닿는 접점이 그만큼 많았다는 방증일 것이다.

 최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와 그의 가족을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다. 사상과 이념을 떠나서, 대학생들을 위시하는 대중의 성토가 더욱 거세지는 추세다. 연세대 노천극장에서는 해당 후보의 사퇴를 촉구하는 촛불들이 타오르기도 했다. 이러한 목소리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화두를 꼽는다면 단연 정의일 것이다. 2020년에도 여전히 우리는 정의를 부르짖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1장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거대한 틀은, 바로 이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이다. 책에서는 행복, 자유, 미덕이라는 세 가지 가치를 들고 있는데, 이는 각각 행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공리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자유주의, 좋은 삶과 도덕적 태도를 중시하는 공동체주의라는 방식으로 귀결된다.

 지금까지 내가 정의의 기치(旗幟)를 논하기 위해 스스로 따졌던 가치는 주로 행복과 자유에 관한 것이었다. 공리주의적 차원에서 개개인들 행복의 총합이 증대되고, 정당한 자유가 보장된다면 이것은 바람직하다는 1차원적인 사고였다. 그러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찾아온 플로리다의 상인들은, 본인들의 행복을 추구하며 자유로운 시장에서의 부를 추구하는 정당한 판매자로 정의될 수도 있고, 동시에 특정 상황에서 높은 가격을 강요해 다른 개개인들의 행복과 자유를 침해하는 약탈자로 정의될 수도 있다. 샌델은 똑같은 행복과 자유라는 가치를 내걸고도 그 관점과 입장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역설의 내 기존의 생각에 대한 도전은 자연히 이러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텐트 판매자가 자신의 마음대로 가격을 올리지 못하게 될 때 침해되는 자유의 크기와, 비싼 텐트를 구매하지 못해 길에서 추위에 떠는 수재민의 고통의 크기를 과연 저울질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면, 누가, 어떻게, 누구의 저울에 이것들을 매다는가.

 여기에서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차원의 가치가 정의를 논한다. 바로 미덕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샌델이, 경제학자들이 미덕과 도덕 규범을 시장 논리로부터 유리화시킨 결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감정과 윤리문제가 정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다. 시장의 논리 안에서 좌우되는 개인의 삶의 형태에 윤리, 도덕 규범 등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우리가 수재민의 고통의 크기를 전자(판매자가 침해받는 자유의 크기)보다 크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보다, 본능적인 것에서 기인한다. 부당함으로부터 오는 분노. 우리 머리 위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선이 있다. 탐욕은 허용된다. 그러나 남의 고통과 불행을 담보 잡는 탐욕은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다. 부당하다. 구석의 모서리가 머리 위의 선을 찌른다. 그러나 막상 이러한 탐욕을 법으로 규정해 처벌하려고 하면 또 다른 구석의 모서리가 선을 찌른다. 사회가 미덕의 편에 설지, 중립에 서서 개인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할지는 어려운 숙제로 남는다. 윤리적 선을 사회가 개인에게 강제할 수 있는가? 우리는 윤리와 당위의 결부를 망설인다.

 AIG 기업의 임원들은 탐욕의 편에서 엄청난 상여금을 받아왔다. 이것은 정당했다. 부를 추구하는 탐욕이 성공해왔기 때문이다. 구제금융 당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때는 양상이 달랐다. 왜냐하면, 성공한 탐욕이 실패한 탐욕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실패하고도 세금을 통해 보상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실패와 성공의 경계는 앞서서 언급해온 개념들보다 훨씬 분명하다. 때문에, 저서에서는 이 지점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부당함이 집약된다고 본다. 상이군인 훈장 수여를 둘러싼 논쟁으로 이는 보다 명확해진다. 탐욕은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지만, 실패는 용납할 수 없다. 이를 통해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은, 정의가 해당 국가의 문화와 관습에 따라서도 달리 정의(定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부당함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어느 부족의 정의는, 다른 정의들보다 그 범위와 크기가 협소한 정의인가? 정의의 범주가 존재한다면, 그 높이도 존재하는가.

 그러나 실패와 탐욕에 관한 저자의 견해는 내 기존의 생각에 도전됨과 동시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이러한 부당함의 지각, 충돌의 가장 큰 원인은 우리가 느끼는 황금률의 위배라 생각한다. , 내가 실패했을 때는 절대 보상받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자명하다는 믿음. 이 황금률에 위반되는 보상이 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앞서서 언급한 조국 사태도 그 궤를 같이 한다. 물론 대한민국 사회에서 고위층의 부정과 특혜 등을 꾸준히 목도해 온 우리 인식 저변에 이러한 부정에 대한 광정(匡正)의 필요성이 축적되어, 사회적 임계점에 도달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1장의 트롤리 딜레마를 뒤틀어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부정한 방법으로 자식을 명문대에 입학시킨 국회의원 갑을 파면시킬 수 있는 레버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레버를 당기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나도 내 자식을 모종의 방법으로 명문대에 입학시킬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 갑은 아무 처벌 없이 활동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그 누구도 모른다면 당신은 이 경우에 버튼을 누르겠는가?

 물론 이는 앞선 논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또한, 저서의 배경인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역사적 배경과 특성상, 실패보다 탐욕을 보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부당함이, 황금률의 위배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 특히 청년세대는 공정성을 강하게 움켜쥐려 한다. 시정적(是正的) 정의를 수호하려고 하는 것이다. 수저론을 위시하는, 삶의 궤적이 어느 정도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자조 하에서도, 노력해서 결과를 이루는 일련의 절차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동등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응당 지녀야 하는 의무와 권리, 소득과 기회가 분배되는 방식은 지금의 대한민국에 있어서 정의와 가장 직결되는 문제다. ‘내가 군대를 다녀왔기 때문에, 국회의원의 자식이 젊은 시절을 거리에서 활보하는 것이 부당하다.’ 이러한 흐름에서 나는 약자를 위한 사회적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미묘한 성질의 사안이라 생각한다. 사회적 정의를 위해 시행되는 약자 우대가 또 다른 약자와 박탈감을 만들어내고, 정의의 차원에 충돌하는 회귀적 문제를 일으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저서에서 말하는 미덕, 도덕 규범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매우 어렵다. 임의적이고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가 미덕과 좋은 삶에 대한 견해가 명확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는 예기치 않은 고통과 불안을 발생시킬 수 있다. 부당함에 대해 사회가 입장을 모호하게 취하면, 사회 구성원들은 자연히 이러한 입장을 체득해, 장기적으로 사회적 질서의 불안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미덕 가치의 수호는 자유와 행복의 총량으로 어느 정도 환원될 여지가 있다. 도덕적 행위, 옳은 행위는 곧 원칙의 확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염소 치기를 죽여야 할지, 철로 위에서 레버를 당겨야 할지 우리는 선택할 수는 있지만,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명쾌하게 답할 수가 없다. 애초에 정의라는 개념이 수학적 명제나 과학적 지식처럼 정식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원화된 삶의 현장에서 습득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는 수많은 옳고 그름, 정의와 부정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자신의 이성에 기대어 자기 자신만의 옳은 일을 할지라도, 이것이 또 다른 논의의 장으로 향하는 것인지, 공공선에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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