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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수의 <꽃>은 타인에게 인식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갈망을 그린 작품이다. 아마 모르는 사람은 나이를 막론하고 드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또 이름을 불리고 싶어한다. 길을 걸어가다가, 익숙한 밝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올때. 그 때 기분이 퍽 나빠지는 사람은 아마 없을 테니까.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익숙한 누군가의 등을 봤을때, 멀리서 그를 소리쳐 이름 부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가 뒤돌아보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가 퍽 반가운 티를 내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난 어쩌면 이 지극히 유치한 클리셰가, 현대사회의 인간들이 우울해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릴 향해 유치하게 손가락질한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인 하루키와 사쿠라의 관계와 소통에 관해 다룬다. 둘은 우연한 일로 알게 되지만 특별한 일련의 소통을 통해서 비밀 공유, 추억 쌓기, 고백하기, 자존감의 회복, 결국 사랑으로까지 관계가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식 플롯(?)과 인물상이 퍽 전형적이지만, 생각보다 그 주제는 심오하다.

 하루키와 사쿠라의 관계는 병원에서 하루키가 사쿠라의 공병문고(시한부 환자가 자신을 기록하는 일종의 일기)를 발견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둘은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다. 사쿠라는 하루키에게 비밀을 지킬 것을 약속받고는, '평범한 날들'을 보내는 것이 소원이라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요청이 곧 관계의 시작이다.

ⓒ ‎Studio VOLN All Rights Reserved.

  둘은 점진적으로 일상을 공유해나가고, 낯선 관계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다시 보다 의미 있는 존재 즉 '관계'로 거듭나게 된다. 이는 작중 계속 등장하는 <어린 왕자>의 함의로 나타나는데, 하루키가 사쿠라와의 만남을 통해 친구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점에서, 둘의 관계는 어린 왕자와 여우의 관계와 유사하다. 서로를 이름 붙이기 위해 진행되는, 일련의 소통의 축적이었던 것이다.

 두 인물의 커뮤니케이션은 서로를 어떻게 이름 붙이는가, 호명에 있어서 다양하고 또 중요한 양상을 보인다. 사쿠라는 하루키에게 선을 넘는 행동들을 하지만 여자친구로 정의되지 않으며, 함께 여행을 떠날 때는 친구도, 연인도 아닌 '무언가'가 되는 거라고 말한다. 즉 정확한 관계로 서로를 정의하는 것을 보류하는 사쿠라의 표현은, 사람과 관계 맺음을 두려워하는 하루키의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다. 반 아이들이 하루키를 재수 없는’ ‘암울해 보이는등의 부정적인 표현으로 이름 붙일 때, 사쿠라는 그를 친한’, ‘사이좋은등의 이름으로 부르며 반 아이들의 부정적인 시선을 상쇄시키며 그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간다. 냉정하게 보자면, 이 영화는 한 명의 개인을 사회로 이끌어가는 혹은 이끌어주는 방식과 방법에 관한 철학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때 사쿠라가 했던 췌장을 먹고 싶다라는 표현 역시 소통이 진전됨에 따라 그 의미가 심화된다. 처음 관계를 맺을 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 같던 그녀의 엉뚱한 표현은 작품의 종반부에 이르러 그것이 그녀만의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요청에서 배려로, 그리고 사랑으로.

ⓒ ‎Studio VOLN All Rights Reserved.

 이러한 사쿠라의 호명, 고백 등으로 하루키는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 자존감 등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사쿠라는 하루키와 자신의 관계가 공병문고를 통한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아니, 그것은 우연이 맞다. 하지만 사쿠라가 그것을 의지라고 이름 붙일 용기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둘의 관계는 하루키가 사쿠라를 이름으로 부르지 못했던 이유가 드러나며, 그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확실해진다. 비록 사쿠라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뒤지만, 두 사람의 고백을 통해서 사쿠라는 평범하지만, 꽉 찬 삶을 누리게 되었고, 하루키는 사람과 소통하는 법,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다. 그들에게 소통은 곧 치유였다.

 오늘날 우리는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때까지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며 대화한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를 접한다고 표현하면 어떤가? 

 우리는 자주 상처받고 실패하며, 가끔은 성공하며 나아간다. 그러한 삶의 경험적 체감에서 오는 궤적은 본의 아니게 우리 스스로를 위축하게 만든다. 보다 용기있게 누군가에게 다가간다는 것. 꼭 비단 연애감정에서 나오는 말 뿐 아니라, 그저 당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 우리에게는 너무도 두렵고 아찔한 일이 되어가고 있지 않는가? 그러한 용기와 기회를 피하고 흘려버리는 것이 곧 어른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유치해보이는 작품은 바로 그 지점에서 유치하게 우릴 향해 손가락질한다. 너의 췌장을 먹을 거다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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