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회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제 26회 벤쿠버국제영화제 인기작품상 수상작.
1979년 발발한 이란 이슬람 혁명과 그로 인해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마르잔 사트라피라는 소녀의 일대기를 통해 그려낸 작품.
[히잡을 둘러써도, 피어나는 소녀의 향기]
[김철수입니다. 이하 글은 영화 페르세폴리스의 줄거리와 결말이 포함되며, 영화에 대한 감상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폭력과 권력, 그 경계로 정의되는 전쟁. 우리는 그 저변을 살피지 않고서도, 그것이 얼마나 참혹하고 처참한 상흔을 가져다주는지 알고 있다. 세계역사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쟁과 다툼이 있었고 그로 인해 흘린 피의 색을 우리는 전쟁을 겪지 않고서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붉고 진하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 상처받고 망가져 버린 사람들, 아픔을 딛고 일어난 사람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향기는 무겁고, 생생하다. 그러한 향기는 형형색색으로 다양하기에, 피만큼 진한 것이다.
영화는 이슬람 혁명이 발발하기 전의 시대상부터 1990년대의 테헤란의 모습까지를, 마르잔 사트라피라는 이란 소녀의 자서전적 성장기와 엮어서 그려낸다. 영화의 분위기는 시종 어둡다면 어둡다. 작가가 역사를 반추하는 데 쓴 화구에는 검은색 물감이 많았나보다. 이란이라는 나라 내의 특수한 국가상황, 피가 튀고, 사람이 사람을 압제하는 시대의 색은 실로 어두웠다. 그 색깔은 그들이 흘린 피의 색이다. 또한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 관객들의 눈동자 색일 수도 있고, 공항에서 내쉬는 마르잔의 담배연기 색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페르세폴리스>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의 집안은 매우 부유하고, 지위도 갖춘 집안이지만 진보적인 성향의 가문이다. 소위 ‘있는 자들’의 투쟁이라 볼 수 있을까. 그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페르세폴리스>는, 내부자들의 회고이자 곧 기억이다.
거칠게 그려진 영화의 만화적 화풍은, 어쩌면 상흔의 역사를 담기에 가장 적합한 화폭이라 생각된다. 기존의 역사에게 선택받았던 주제들, 그것들이 실현되기로 마음먹었던 공간은 모두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리얼리티를 기반으로 하지 않았던가. 영화 <페르세폴리스>는 이러한 기존의 표현 방식에 전적으로 반기를 든다. 이란의 어두운 분위기, 테러, 전쟁, 여성들에 대한 탄압, 그러한 잔혹한 현실 앞에서 색채를 잃는 인간 군중들, 더욱 광폭한 향기를 띄고 타인을 압제하는 것들. 우리가 그것들을 떠올리며 그리는 생생한 리얼리티 대신, 영화는 애니메이션, 그것도 색연필로 투박하게 그린 듯한 거친 화풍으로써 참혹함을 담아낸다. 이러한 담담한 표현적 자조는 현실에 대한 회피가 아니라, 오히려 정면으로 그것에 맞선다. 때문에 이러한 날것의 그림이 담고 있는 대담함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담담히 뒤흔든다. 할머니의 속옷 위로 흩날리는 이차원 꽃들의 향기는, 그것이 진짜 같지 않아서 더욱 진심으로 다가온다.
이란 내의 왕조에 독재의 그늘이 드리워지고, 국민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는 분위기 속에서, 마르잔의 가족들은 왕조세력에 맞서 투쟁하며 피를 흘린다. 초반부 아누슈 삼촌으로 대변되는 이러한 모습들은 흡사 기득권에 맞서는 기득권의 항거로써, 노블리스 오블리제적 인물상으로 비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작가의 이러한 인물설정에는 캐릭터의 성장도 감동도 없다. 그저 그들은 맞서다 죽었으며, 그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유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투쟁을 자처했는지에 대한 감정적 강요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이란과 이라크 사이의 전쟁과, 이란 내부의 정치적 탄압을 겪은 한 명의 개인으로써 등장할 뿐이다.
“자유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
기존영화들이 이러한 서사 틀에서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감정적 동일시를 요구했던 것과는 차별화된다. 마르잔의 가족들은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나 슬픔은 잠시 화면 뒤로 자리를 비우고, 그로 인한 불평도 없다. 그들은 그저 딸을 사랑하는 평범한 가족의 테두리로 환원된다. 상황과 서사에 대한 억지는 배제되고, 공항에서 딸을 배웅하며 눈물을 흘리는 부모의 눈물만이 기억으로 남았다. 투쟁의 당위성에 대한 설명은 있지만, 투쟁을 하는 인물에 대한 슬픔을 강요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바로 인해, 서사의 주관성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게 된다.
성공한 이란 혁명. 그러나 이란의 민주주의 세력은 혁명의 주도 세력으로 자리 잡는데 실패하고 만다. 반대파 이슬람 과격주의 세력이 혁명의 과실을 취하면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사상의 자유가 탄압받고, 민중들은 더욱 억압받는 시대가 도래한다. 차도르로 대변되는 이러한 억압을, 소녀 마르잔은 견딜 수가 없다. 아이언 메이든의 테이프를 사고, 경찰을 피해 다니며, 부조리함 앞에서 헤드뱅잉을 하는 모습은 암담한 당시의 현실에 대한 소녀의 유머러스한 대처다. 결국 마르잔은 가족과 이별하고 오스트리아로 떠나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경험하고 폐인이 되고 만다. 인종차별, 고국에 대한 향수, 사랑의 실패는 전쟁의 참혹함보다 오히려 더 처참하게 마르잔에게 저주를 내린다.
그러나 이러한 저주가 사실은 전쟁으로 인한 것임을 우리 모두는 알고있다. 저주를 피해 다시 이란으로 돌아온 마르잔은 또 다시 차도르를 둘러쓴다. 오스트리아에서의 저주는 돌아온 이란에서 축복으로 위장한 채 마르잔에게 다가오지만, 그녀는 남편 없이는 편히 돌아다니지도 못한다. 마르잔은 가슴과 엉덩이가 커진 숙녀가 되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영화 속 마르잔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로서 모든 화면 내에서 작동한다. 7살의 공항에서 뛰어놀던 마르잔이 20대의 숙녀가 될 때까지의 변화는 매우 명확하며 자연스럽다. 천방지축의 꼬마가, 타지에서 사랑의 아픔을 겪으며 폐인이 되는 변화의 모습은 사뭇 연민을 자아내는 서사임과 동시에, 변화로의 진입이다. 이러한 변화에 맞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에, 시련은 당연하다. 결국 이는 ‘할머니’로 비유되는 두려움에 맞서는 용기의 가치가 자연스럽게 손녀에게 전승될 것을 예언한다. 결국 영화 <페르세폴리스>는 이란 혁명이라는 거시적 국가상황을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개인들의 서사와 기억을 생생히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기존의 시각에 반기를 든 주요한 쟁점은 이러한 서사의 초점에 있다. <호텔 르완다>의 르완다 내전과 같이, 이란의 참혹한 현대사는 일반 관객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주제일 수 있다. 이러한 서사를 전달하는 기존의 방식은, 주인공에 대한 감정적 동일시나, 친근하고 익숙한 인물상들을 대입해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러한 접근방식을 갖춘 영화들은 실재하는 현실을 온전히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데에는 대부분 실패하고, 단순히 주인공의 감정이입에 대한 귀결물로써 영화적 감흥을 창출하는데 그쳤던 것이다. 그러나 <페르세폴리스>에는 그러한 감동은 없다. 소녀는 숙녀가 되고, 전쟁의 참혹함에 눈물 흘리고, 고국을 떠난 타지에서 새로운 차원의 상처를 받는다. 그녀가 이러한 현실에 굴종하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를 다잡는 장면들이 영화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지만, 영화는 이러한 희망을 관객에게도 심지어 영화 속 인물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참혹했던 이란의 격동적인 현대사를 교조적으로 설파하는 것이 아닌, 한 소녀의 일상적인 삶으로써 치환해 구체화시켰다는 점이다. 우리는 생소한 이란의 역사를 ‘소녀의 삶’을 통해서 충분히 엿볼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머러스한 지점들마저 찾을 수가 있다. 폭격을 맞은 집터와 일상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페르세폴리스>는 마르잔 사트라피, 개인의 삶에 관한 일대기이자 성장기다. 그러나 마르잔 개인의 삶에, 사회의 역사가 등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영화가 역사영화로써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이란으로 대표되는 중동국가, 그 중에서도 탄압의 대상인 여성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에 대해 반성하고 자조할, 기회와 시각을 얻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페르세폴리스>는 영화의 내부와 외부, 쌍방향적 차원으로 작동하는 영화가 아닌가 한다.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고통의 근본적 원인이었던 전쟁이 서방세계의 무기장사로 인해 더욱 참혹했다는 점은, 그들의 인도주의적 가면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그들의 잔혹한 역사는 어디서부터 왔고, 누구로 인해 더욱 참혹했단 말인가.
폭격으로 더욱 참혹해진 터전 위에서 가해지는, 여성들을 향한 더욱 더 폭력적인 억압은 우리로 하여금 기존의 시각을 반성하게 한다. 공항에서 히잡을 둘러쓴 여성들을 보고 누구나 느꼈을 뜻 모를 감정은, 이제는 사뭇 자조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차도르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다니는 여성들에게 더한 잣대를 들이대는 이란의 경찰들,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처참한 당시의 시대상, 그 이면을 넘어 우리 자신들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페르세폴리스>는 마르잔의 당당한 태도와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각성의 시선과 도전장을 내민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불공정한 정의에 입장을 떳떳이 밝히는 마르잔의 모습에 대한 공감은 우리에게 양가감정으로 동시에 다가온다. 이러한 감정적 충돌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시선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이는 곧 영화 내의 상황과 우리들, 관객들 간의 유리화를 해체하게 만든다. 작가의 도전은, 이란 내부로만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혁명에 소중한 가족을 잃고, 전쟁도 이겨낸 나였는데, 고작 사랑 때문에 무너졌다.” 오스트리아에서의 마르잔의 회고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마르잔이 거리를 방황한 원인은 전쟁임이 자명하다. 그녀가 느꼈던 허무주의는 어디에서 왔는가. 진실로, 사랑에 의한 상처가 그녀로 하여금 쓰레기통을 뒤지게 만들었는가. 전쟁이라는 비극이 한 개인을 그녀의 터전으로부터 몰아냈던 참상의 책임으로부터 어찌 자유로울 수 있는가. <페르세폴리스>가 묻는 바다. 그렇다면 개인은 어떻게 흔들려야 하는가. 개인이 전쟁에 온전히 맞서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시스템과, 현상 앞에서 우리들은 무기력한가.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인 비극 앞에서도 개인들은 삶을 포기할 수 없다. 용기, 정직, 유머 같은 좋은 것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폐허가 된 공터 위에서 이미 스러진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간다. 카스피 해의 공기는 특별했으리라. 다시 프랑스로 떠난 마르잔은 여전히 공항에서 서성이며 고국을 생각한다. 그녀의 담배연기는 여전히 검은 빛일까. 우리들의 눈동자 색도 여전히 검은 색일까. 택시 기사의 어디서 왔냐는 물음에 담담히 “이란”이라고 답하는 그녀의 모습.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근본을 한 손에 소중히 쥐고 놓지 않는다. 다시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많은 것들이 변했고, 그녀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떠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마르잔에게 건넸던 눈물과 용기는 여전히 그녀의 다른 한 손에 쥐어져있다.
차도르를 둘러써도, 꽃의 향기는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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