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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김철수입니다. 이하 글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 3부작, 영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느 가족>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는 분은 영화를 감상하신 뒤 돌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가족의 의미는 유교권의 문화에 속한 우리에게는 특히나 각별하게 다가왔다. 가족은 사회적으로는 가장 근원척이고 원초적인 집단으로, 개인에게는 궁극적으로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가치로서 작동해왔다. 가족은 가족이라는 말 자체로 완결되었다. 그러나 시대는 급변하고,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가족의 의미도 이제 조금씩 흔들거린다. 가족을 버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는 뉴스나 신문기사는 우리에게 더 이상 놀라운 소식이 아니다. 이제는 변했다라고 느낄 때, 그러한 인식과 감정은 곧 우리의 윤리의식과 죄책감이 작동하는 지점이다. 고레이다 히로카즈는 바로 이곳에서 무언가 말한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바는 가족구조의 해체다. 어머니는 어머니가 더 이상 아니다. 우리가 기존에 알던 아이를 돌보고 식사를 준비하는 엄마의 모습은 사라진다. 개를 한 손에 들고, 자식은 트렁크에 숨긴다.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지키려 했던 과거의 가족은 공항에 자식을 묻는 것으며 분해된다. 영화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아예 등장하지 않음은, 기존의 가장의 틀 자체가 해체됨을 의미한다. 역할은 희미해지고, 동시에 전복된다. 가족은 이제 언제든 해체될 수 있는 집단이 된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현대사회에서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가족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 (巣鴨子供置き去り事件) 이라는 충격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니, 내용을 모르시는 분은 한 번쯤 검색해서 보시라. 매우 흥미롭고, 처참하다. 현대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강렬한 의문이 생겼던 사건. 

 

 히로카즈 감독의 전작이 가족의 해체에 관한 것이었다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되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핏줄은 우리에게 곧 신앙이었다. 대를 잇고 나를 후계할 자식은, 나의 피로 이어진 자여야 한다는 대전제가 곧 가족의 의미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의 절대적 신봉자였던 료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케이타에게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추며 사과하게 된다. 자신의 핏줄이 아닌, 정으로 키운 케이타를 아들로 인정하는 모습은 비혈연가족 역시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이데올로기적 통섭이다. 이처럼 함께 보낸 시간과 정을, 핏줄보다 강력하고 견고한 연결로 인식하는 바는 곧 과거 가족의 의미에 대한 도전이자 해체다. 또한 류세이의 가정집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료타 가족의 발걸음은 더 넓은 의미에서 커뮤니티적인 가족의 모습을 제시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고레에다 감독은 가족을 만드는 것이 핏줄시간중 어느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감독은 끊임없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행위와, 사진 그 자체를 조명한다. 카메라는 곧 시선이며 사진은 그 관계를 보여준다. 두 가족이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서로에게 보여주는 사진 속, 아들의 모습은 극명히 다르다. 수영장에서 웃고 있는 천진난만한 모습과, 증명사진 속의 모습. 료타는 관계를 증명하면 그만이었지만, 유다이에게는 자식과 함께 보낸 시간이 바로 부자父子 관계 그 자체였던 것이다. 영화의 종반에서 료타는 케이타가 자신을 찍은 사진들을 보게 되는데, 그곳에는 자신의 뒷모습과 자는 사진들뿐이었다. 케이타의 입장에서 아버지는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진은 이러한 인물간의 관계를 보다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서 작동된다. 유다이 가족과 함께 내천에서 찍은 사진에서도, 아들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부자父子간의 시선과 관계가 확인된다.

 이렇게 가족의 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되는 흐름에서 더 나아간 바가 <어느 가족>이다. 전작들이 최소한의 가족의 의미로써 피와 시간의 연결점을 가지고 제시되었다면, 전혀 그런 것들이 없는 사람들도 가족의 울타리 안으로 묶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친엄마가 주지 못한 사랑을 주고,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또 다른 누군가가 집에 존재한다면, 그는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가족이 전하는 사랑보다 더한 것들을 나누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은, 서로의 유대감이 혈연과 법적 테두리를 넘어설 수 있는 가족의 또 다른 형성조건임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가족은 무엇인가. 가치관이 변화하며 무조건적인 부모와 자식을 위한 헌신이 조금씩 빛 바라는 지금, 우리가 가족에게 기대하는 것들은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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